해외 여행이야기

중국천산보그다트래킹 첫날.

지리산.. 2010. 8. 10. 04:05

 

2010년 7월 31일..

 첫날..

 

 뭐 거하게 에필로그을 적고 서두을 거창하게 적고는 싶은데...

다 부질없는 일..

 

그렇다고 글을 잘 적는것도 아니고..

야그을 재미있게 하는것도 아니고..

그래서 앞뒤 다 빼고 시작한다..

 

너무 기대는 하지말고..

그림만 보실길..^^

 

~~~~~

 트래킹 출발 이틀전 아버지제사을 지내고 애들은 부산 처가집에 보내고 홀로 올라와 6박7일동안 집 나갈준비을 해본다..

트래킹..

 

97년도에 중국 황산을 다녀온 뒤 오래만에 세상속으로 나가본다..

뭐 그렇게 흥분되고 하는것은 없다..

그냥 다른나라 다른산으로 간다는것..

 


땅이 우리나라보다 크니 산도 클것이고.도로 또한 클것이다..

가볍게 우리나라보다 좀 크다고 생각하면된다..

 

줄줄이 글을 적고싶으나 이 또한 하기가 싫다..

사진정리도 포샵이나 수정이니 해서 올리고 싶으나 언제 수정해서 올리겠나..

 

사진 전시회나가는것도 아니고..

그래서 그냥 렌즈에 찍힌 그대로 올린다..

 

맘에 안들면 안봐도 된다..

 

내가 살아가면서 두발로 걸었던 길이기에 그냥 흔적만 남기는것이기에 아무런 후회도 없다..

추후 우연히 어쩌다 혹시

이곳 천산 보그다 트래킹 가시는분들에게 조금만 영상을 보여주는것으로 만족한다..

 

개고생했다..

 

 

 

오늘은 이곳까지..

우루무치...

 

잘 보면 뱅기표에 탑승구 번호가 없다..

결론은 알아서 무한정 기다리고 있으면

나중에 뱅기 태워준다는것이다..

 

그래서 차이나..

 

 

 

#.일정:7월31일=출국및 북경경유, 우루무치도착

          8월 1일=우루무치에서 차량으로 "흑구"계곡으로 이동, 트레킹시작, (1캠프설치)

                   ("삼차구촌" 1800M계획을 변경 도로유실로 접근 불가, "흑구"로 변경 이동)

          8월 2일=흑구 출발 보그다BC까지 트레킹.(캠프2 설치)

                   (이동거리 약 25KM => 08시 30분 산행시작, 3일 01시 BC캠프 도착

                                                            후미팀기준: 16시간 30분 산행완료) 

          8월 3일=보그다BC출발, 몽골포도착, 우루무치로이동 숙박.(캠프3)

                    (이동거리 약 12km => 08시 출발 17시 몽골포도착)

          8월 4일=우루무치에서 투르판으로이동 관광,  쿠무다거 사막도착 야영(캠프4)

                    (교하고성, 커얼츠, 베제클릭 천불동, 화염산, 아스타나고분, 소공탑)

         8월 5일=쿠무다거 사막출발  우루무치도착(역사박물관 관광) 북경으로 이동.

         8월 6일=북경출발 인천공항도착(12:00) 평택도착(15:00) 식사&해단식

 

앞에 일정하고 뭐 큰 차이는 없는데..

이것도 그냥 참고로 하기로...^^

 

 

 

 

집 나갈준비중..

 

 

 

 

 

인천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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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국제공항이 있는 영종도와 송도국제도시를 연결하는 총연장 18.38km의 다리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길다. 6차로이며 바다를 가로지르는 다양한 형식의 특수교량으로 구성되어 있다. 2005년 7월 착공하여 4년 4개월 만인 2009년 10월 완공하였다.

 

인천대교 건설사업은 인천국제공항이 있는 영종도와 인천경제자유구역인 송도국제도시를 잇는 최대 6차로, 총길이 21.38 km의 고속도로를 건설하는 사업이다. 이중 서해를 횡단하며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교량 구간이 인천대교이며, 그 길이는 18.38 km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긴 다리이다. 바다를 건너는 구간은 민간자본투자사업으로 건설하였으며, 영종도 내 고속도로와 송도국제도시 통과 구간은 국가재정사업으로 진행하였다. 한국도로공사가 전체 사업을 총괄관리하였으며, 민간투자사업 구간에 대해서는 인천대교주식회사가 시행을 담당하였다. 2005년 7월에 착공하여 2009년 10월에 완공하였다.

해상구간은 사장교(1,480m), 접속교(1,778m)와 고가교(8,400m)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중 주항로부에 있는 사장교의 주경간장은 800m로 사장교 형식으로는 준공시점을 기준으로 세계에서 4번째로 길다. 주탑의 높이는 230.5m로 국내에서 가장 높다. 또한 BTO(Build-Transfer-Operate) 방식으로 추진되어 국내 최초로 사회간접자본 사업에 외국인이 시행자로 참여하였다. 인천대교(주)가 민간사업구간 사업비 중 약 52%인 8,200억원의 자금을 조달하고 완공 후 30년 동안 운영권을 가진다.

국고구간은 다양한 형식의 특수교량과 토공부 도로로 이루어져 있다. 주요 교량으로는 하이브리드 중로 아치교(213m), 스트럿이 부착된 박스 거더교(2,209m), 나비형사장교(230m) 및 엑스트라도즈교(308m)가 있다.

인천대교는 설계와 시공을 병행하는 패스트트랙(Fast Track)방식으로 진행하였으며, 초속 72m의 강풍과 진도 Ⅶ(7)의 지진에 견딜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고 주항로부에는 선박과 교량의 충돌을 방지하기 위한 세계최대 규모의 돌핀형 충돌방지시설이 설치되어 있다. 국내 최초로 교량의 하부구조상부구조 설계에 하중·저항계수설계법(LRFD)을 적용한 것을 비롯하여 세계적 수준의 최신 토목기술을 총동원하여 건설하였다.

인천대교의 완공으로 인천과 서울 남부, 수도권 이남 지역에서 인천국제공항까지 그리고 인천국제공항에서 송도국제도시까지 소요되는 주행시간이 40분 이상 단축되었으며 물류비와 이산화탄소 발생량이 감소되는 효과가 있다. 또한 제2경인고속도로영동고속도로와 연결되어 동북아 경제의 핵심 인프라의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인천공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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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광역시 중구에 있는 국제공항.
구분 국제공항
설립연도 1992년 11월
소재지 인천 중구 운서동 2172-1
부지면적 5619만 8600㎡(1,700만 평)
여객터미널 연면적 51만 4910㎡(15만 평)
관제탑높이 100.4m
활주로길이 길이 3,750m, 너비 60m, 두께 105cm인 활주로 2본
연간발착횟수 17만 회/연
여객 2,700만 명/연
화물

170만 t/연

 

21세기 수도권 항공운송의 수요를 분담하고 동북아시아의 허브(Hub)공항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기 위해, 영종도와 용유도 사이를 매립하여 1992년 착공하여 8년 4개월만에 총공사비 7조 8,000여 억원이 투입되어 2001년 3월 29일 개항하였다.

1단계 공사가 마무리되어 2001년에 개항한 인천국제공항은 연간 17만 회의 항공기 운항을 통해 2,700만 명의 여객과 170만 t의 화물을 수송할 수 있게 되었다. 1995년 기본계획에서 공항 인접 동쪽에 배후지원단지와 이주단지를 조성하려던 당초의 계획을 변경하여, 이 일대를 활주로 확장에 대비한 유보지로 남겨두고 공항에서 1.7km 떨어진 영종도 중심부로 이전하였다.

시설은 여객터미널, 화물터미널, 계류장시설, 항행안전시설, 교통시설 등으로 구분된다. 여객터미널은 체크인 카운터가 270개, 여권심사대 120개, 보안검색대 28개, 출발여객 처리용량은 시간당 6,400명이다.

화물터미널은 항공기 24대를 동시에 세울 수 있는 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연간 화물처리능력은 170만 t이다. 계류장 시설은 33만 평으로 항공기 60대를 동시에 계류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관제통신시설은 지상 22층 높이의 100m의 관제탑이 설치되었으며, 활주로의 시정거리가 50m인 상태에서도 항공기의 착륙이 가능하도록 계기 착륙시설과 표지시설을 갖추고 있다.

인천국제공항을 중심으로 한 영종도 일대는 단독, 주택용지에 6,200여 가구가 건설되어 입주할 예정이며, 공공시설 용지에는 교육시설과 공원 등이 조성될 예정이다. 인천국제공항의 마스코트는 허비(Huby)이다.

최종 공사가 마무리되는 2020년 이후에는 활주로 5개로 증대되며, 여객 터미널 규모 875㎢, 여객수 1억 명, 화물 700만 t, 운항 횟수 53만 회(연)로 증대될 것으로 예상된다.

 

 

 

 

 

자~~~

지금부터 인내심과 한판...

인천공항..

 

 

 

 

 

이민가는중..

 

 

 

 

 

 

산사님과 황석연팀장..

 황팀장 이때만해도 얼굴 볼만했다..

근데...

 

 

 

 

룸 메이트..

왕눈이..

 

 

 

 

 

폼생폼사..

조은하늘..

정하형 멋진분이다..

 

 

 

 

 

오늘은 이렇게 뱅기만 기다린다..

 

 

 

 

 

지금은 얼굴색이 좋다..

그런데..

 

몇일후...

 

 

 

 

 

베이징 기다리다 지쳐..

엉아들과 공항에서

 

라면에 이슬이로 기분전환...ㅎㅎ

 

좋은나라여..

입국심사끝나고서 공항에서 이슬이 마시고..

 

 

 

 

 

 

형들.

누님.

 

얼굴색이 좋다..

 

 

 

 

 

 

 

 

 

 

이제 차이나는 차이나로간다..

 

 

 

 

 

 

 

 

 

 

큰형..

산사님이 잴 바쁘다..

왜 기록을 남겨야 하기때문에...ㅎㅎ

 

형님 소중한 기록 감~~~솨.^^

 

 

 

 

뱅기 떴다..

차이나로..

 

 

 

 

기내식 ..

불고기인가..

좀 많이 짜다..

 

 

 

 

밥먹고 맥주한잔하니 베이징하늘..

고속도로인지 국도인지 시원하다..

 

 

 

 

 

 

 

차이나..

 

 

 

 

 

베이징 공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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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수도 베이징[]에 있는 국제공항.
구분 공항
설립연도 1958년 3월 2일
소재지 중국 베이징
부지면적 139만 500㎡
터미널규모 3개
활주로길이 3200m, 3800m, 3800m
여객 5594만 명(2008)
화물 136만 5768t(2008)
취항항공사 72개(2009)

 베이징으로부터 북동쪽으로 28㎞, 베이징의 중심인 톈안먼[] 광장에서 25.35㎞ 떨어져 있다. 1958년 3월 2일 개항한 중국 최대 허브공항으로서, 중국인민항공청(Civil Aviation Administration of China) 산하에 있고, 공항 운영은 1988년 중국민항국에서 분리하여 주식회사 형태로 설립한 베이징수도국제공항공사[]로 이관하였다.

처음에는 소형 터미널을 갖추고 VIP 승객과 전세기가 주로 이용하였으나, 1980년 1월 1일 격납고 등을 갖춘 제1터미널(T1)이 개장되었고, 1999년 11월 1일 제2터미널(T2)이 개장되었다. 또 2008년의 베이징올림픽을 대비한 제3터미널(T3)이 2004년 3월에 착공되어 2008년 2월 29일 개장되어 모두 3개의 터미널을 갖추고 있다.

제3터미널 건설과 함께 활주로도 1개를 증설하여 길이 3200m에 너비 50m인 활주로 1개와 길이 3800m에 너비 60m인 활주로 2개 등 총 3개를 갖추고 있다. 연간 6000만 명의 여객 수송능력을 갖춘 제3터미널이 개장됨으로써 총면적 139만 500㎡의 3개 터미널에서 연간 9500만 명의 여객을 수송할 수 있게 되었다. 2008년 5594만 명의 여객을 수송하여 전세계 공항 가운데 8위를, 화물 처리량은 136만 5768t으로 18위를 기록하였다.

제1터미널(T1)은 면적 7만 8000만㎡로 3개 터미널 가운데 규모가 가장 작으며 국내선으로 이용된다. 제2터미널(T2)은 면적 32만 6500㎡로 동시에 20대의 비행기가 계류할 수 있다. 면적 98만 6000㎡로 단일 터미널로는 세계 최대 규모인 제3터미널은 T3C·T3D·T3E의 3개 터미널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터미널을 연결하는 모노레일 열차가 운행된다.

2009년 현재 중국국제항공·중국남방항공·중국동방항공 등 중국 항공사와 대한항공·아시아나항공·일본항공·말레이시아항공·전일본항공(ANA)·노스웨스트항공·캐나다항공·루프트한자항공·브리티시항공(BA)·오스트리아항공·프랑스항공·알이탈리아항공·파키스탄항공·싱가포르항공·타이항공·드래건항공·스칸디나비아항공(SAS) 등 외국 항공사를 합하여 총 72여 개의 항공사가 취항하고 있다.

 

 

 

 

 

 

 

 

 

비자..

 

***  비자 [査證, visa]

        국가가 외국인에 대하여 입국을 허가하는 증명서로 사증(査證) 또는 입국사증이라고도 한다.

      최근에는 국가 간에 비자면제협정을 체결하여 3개월 정도의 단기간 체재 때에는 비자를 면제하는 나라가 많다.

      우리나라도 프랑스ㆍ영국 등 여러 나라와 이 협정을 체결하여 비자 없이 이들 나라에 단기간 체재할 수 있게 하고 있다

 

 

 

 

 

 

 

 

 

 

 

 

입국심사중..

 

 

 

 

내 카고백 찾으려가면서 열차인지 기차인지 타고가면서

무거운 카레라들고 셀프중..

 

 이렇게 지루함을 보낸다..ㅎㅎ

 

 

 

 

 

짐 찾고..

 

 

 

 

 

우루무치로 간다..

 

 

 

 

 

국내선으로 갈아탄다..

 

 

 

 

 

 

 

 

 

 

 

 

기다림..

 

 

 

 

 

 

뱅기올때까지 무한정 기다림..

 

 

 

 

 

오후 8시 30분에 뱅기뜬데..

 

 **  우루무치 [(오노목제), Urumqi] **

 

       
중국 신장웨이우얼 자치구[]의 주도().
위치 중국 신장웨이우얼 자치구[]
경위도 동경87°35′ 북위43°48′
면적 10989㎢
행정구분 7구 1현
시간대 UTC+8
소재지 30
홈페이지 http://www.urumqi.gov.cn
인구 1,538,778 명(2006년 기준)
인구밀도 140 명/㎢(2006년 기준)

톈산[]산맥의 북쪽 기슭, 해발고도 915m의 고지에 있으며 우루무치강변에 위치한 데서 연유한 지명으로 우루무치는 ‘투쟁’이란 뜻이다. 또 ‘광대한 목초지’라는 뜻이라고도 하는데, 일찍이 중가르부후이족[]이 격렬한 싸움을 벌였던 곳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7세기 무렵 당나라의 위세가 이곳에 미쳐 북정도호부()를 설치하여 톈산북로[]를 관할하면서 정주()라고 하였다. 그 후 오랫동안 몽골 ·투르크계() 등 여러 유목민족의 쟁탈지가 되었으나, 18세기 중엽 무렵 청나라건륭제()가 중가르부를 평정하고 북쪽에 새로이 한성()을 축조하여 디화[]라고 하였다.



1881년 러시아와의 조약으로 개시장()이 되고, 한때 러시아의 세력권에 들기도 하였다. 1882년 신장성이 설치되자 그 성도()가 되었고, 민국시대에는 디화현[]이라고 하였으나 중공정권 수립 후, 디화라는 지명이 계몽 ·교화 등의 어의(), 즉 이민족을 통치한다는 뜻이 내포되었다고 해서 원지명인 우루무치로 다시 개칭하였다.

내륙분지초원기후로 목초가 많아 예로부터 목축이 이루어져 양모 ·피혁 ·잡화 등의 거래가 성하였으나, 댐이 축조되고 관개수로가 정비되면서 농작물의 수확이 급증하고 있다. 부근에서 석유 ·석탄 ·철광 ·구리광이 발굴되고, 자원개발과 함께 전력 ·면방직 ·시멘트 ·화학 ·제분 ·피혁 ·주철 ·강철 ·자동차수리 공업 등이 발달하였다. 자동차도로의 중심지이며, 란신철도[:∼우루무치]로 룽하이선[?]과 연결되어 중국 동안에 있는 롄윈항[]에 이를 수 있다. S.헤딘의 중앙아시아 탐험대의 본부가 설치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신장의과대학이 설립되어 신장 지구의 문화 ·경제 ·교통 ·군사의 중심지를 이룬다.

 

 두산백과사전 EnCyber & EnCyb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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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Wulumuqi (웨)Wulumuchi. 몽골어로는 Urumchi.
중국 북서부 신장웨이우얼 자치구[新疆維吾爾自治區]에 있는 도시.
몽골어로 '좋은 목초지'란 뜻을 지니고 있는 우루무치는 이 자치구의 주도이다. 톈산 산맥[天山山脈]의 북쪽 기슭을 따라 있는 비옥한 오아시스 지대에 있으며, 타림 분지에서 준가얼 분지[準喝爾盆地]에 이르는 계곡의 북쪽 끝을 차지하고 있다.
중국인이 처음 이곳을 지배한 것은 8세기로, 당시 중국인들은 이 도시에서 동쪽으로 130㎞쯤 떨어진 곳에 북정도호부(北庭都護府)를 설치했다. 그무렵 우루무치에는 윤대현(輪臺縣)이 설치되었다. 이곳은 투르키스탄을 횡단하는 주요노선을 따라 이리 강[伊犁河] 유역까지 여행하는 대상(隊商)들에게 중요한 중심지가 되었다. 750년대에 들어 당(唐 : 618~907)나라가 이 지역에서 철수하자 우루무치는 위구르족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18세기에 준갈이부(準喝爾部)와 청(淸)나라가 전쟁 상태에 돌입하면서 이곳은 다시 중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1760년 오아시스 주변지역에는 군사 주둔지가 세워졌으며 1763년에는 중국식 도시인 적화성(迪化城)이 들어섰다.
그후 이 도시는 청나라가 중국 북서부를 방어하는 데 중요한 요새가 되었다. 1860년대 신장에서 이슬람교도의 반란이 일어났다. 1864년 우루무치는 반란군에게 점령당했으나, 1876년 좌종당(左宗棠)이 지휘하는 청군(淸軍)이 극적으로 되찾았다. 1884년 신장이 성(省)으로 되면서 우루무치는 성도가 되었다. 그후 우루무치는 중앙 아시아에서 가장 큰 도시이자 교역 중심지로 급성장했다. 청대 말기에 영국과 러시아가 각기 신장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듦에 따라 우루무치의 전략적 중요성과 국제적 의미가 높아졌다. 이에 비례해 상업적 중요성도 커졌다.
1949년 이래 우루무치는 신장의 행정수도이자 문화중심지로 발전했을 뿐만 아니라 주요공업기지로 발전했다. 1960년초에 우루무치와 중국 철도망을 연결하는 철도가 완공되었다. 이 철도는 당초에는 서쪽의 소련 철도망과 연결하기로 되어 있었다. 철도를 따라 간선도로도 건설되었으며, 준가얼 분지와 타림 분지를 가로지르는 또다른 간선도로도 놓여져 우루무치의 교통이 크게 개선되었다. 톈산 산맥 기슭을 따라 관개 농토를 넓히기 위한 노력도 계속되었으며 기계화 영농으로 이 지역의 농업 생산력도 증가되고 있다.
그러나 우루무치가 새로이 번영을 누리게 된 것은 광산자원 덕분이었다. 1955년 준가얼 분지 북쪽의 커라마이[克拉瑪依]에서 대규모 유전이 발견되어 1958~59년 생산에 들어갔으며, 이후 중국의 주요 석유산지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톈산 산맥 기슭을 따라 석탄이 광범위하게 매장되어 있는 것도 발견되었다. 주요광산지는 우루무치 부근과 류다오완[六道灣]이다. 대형 화력발전소, 제철소와 제강공장, 농기계를 생산하는 엔지니어링 공장, 시멘트 공장, 화학 및 비료 공장, 정유공장, 면방직공장도 세워졌다.
우루무치에는 아직도 위구르어를 사용하는 위구르족이 많이 살고 있다. 위구르족의 대부분은 이슬람교도이다. 이밖에 카자흐족·후이조[回族]·만주족 등의 소수민족도 있다. 위구르 문화의 기지를 만들기 위한 노력도 행해지고 있다. 대학교, 소수민족을 위한 대학, 러시아어·의학·농학을 가르치는 학교 등을 포함한 고등교육기관과 각급 학교가 있다. 인구 1,130,000(1993).

 

 

 

 

 

 

 

 

국내선이라 밖에서 이렇게 탄다..

역시 차이나..

 

 

 

 

 

 

 

 

 

 

 

 

 

 

 

베이징 출발 이만큼 갔데..

 

 

 

 

 

 

 

 

 

 

우루무치 도착..

 

 

 

 

 

00시45분에 우루무치 도착..

 

 

 

 

 

짐 찾고..

 

 

 

 

호텔로 가 짐풀고 이슬이 한잔하고 몇 시에 잤는지 모른다..

 

 

 

 

 

새벽에 도착하여 본 우루무치 공항..

 

이래 저래 하루종일 차타고

뱅기타고.

기다리다 날샜다..

 

 

 

 

  배낭과 항상 생활하실길...

             

 

치밭목 산장(조권식) 올림 치밭목산장 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