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천년의 숨소리가 들리는 경주에서...

지리산.. 2010. 12. 14. 23:10

 

2010년 12월 11일..

경주여행에서..

 

 

오래만에 고향집으로 향한다..

그것도 모임겸. 가족여행으로 경주로 가본다..

 

금욜 직장반회식..

기타 술자리을 외면하고 일찍집으로 들어온다..

내 차량을 폐차하고나서 누나차을 빌려서 다니고있는데 영~~~  차가 마음에 안든다..

 

그래서 금욜 술자리을 모두포기하고...

툐욜아침일찍 집을 나서 경주로 가본다..

고향집가는길은 어느 고속도로을 타던 고향집앞으로 떨어지게 되어있다..

그래서 안바쁘고 시간적 여유가 있으면 가끔씩 인근지역 관광지에서 잠시놀다가 고향집으로간다..

 

이번 여행지 경주.

2009년 여름때 불국사.석굴암을 구경하고나서 오래만에 경주을 찾았다..

아직까지 유진이나 지훈이는 그냥 구경하고 노는것밖에 없는것갔어..

잠시 설명을 해주면 그때뿐..

 

그래도 잘 따라다닌다..

이렇게 날짜와 사진을 남기는것도 나중에 애들을 위해서....

 

오늘은 저녁에 김해에서 모임총회가 있어 좀 빨리 가봐야한다..

그래서 경주i.c에서 가까운 천마총.첨성대 안압지.경주박물관등 걸어서 다닐수있는곳으로 짧은 여행을 해본다..

 

겨울이라는계절..

춥고 해가짧은것..다른계절보다 볼거리가 좀 허~~~   하다는것...

이것저것 따지면 언제 세상구경하겠는가..

 

겨울여행...

경주..

 

F11 누르고보셔~~

 

 

경주첨성대(慶州瞻星臺) 국보  제31호

 

 
 
 
 
 

첨성대(瞻星臺)는 경주시 반월성 동북쪽에 위치한 신라 중기의 석조 건축물로, 선덕여왕대에 세워진, 현존하는 동양 최고의 천문대로 알려져 있다. [1]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31호로 지정되었다.

 

 

위치 및 구조

첨성대는 신라의 왕궁이 있었던 월성 북편에 위치하고 있다. 362개[2]화강암 벽돌을 사용하여 원통형으로 축조하였다.[3] 높이는 9.17미터[4]로 바탕의 지름은 5.17미터, 상층부의 지름은 2.5미터이다. 2미터에서 4미터의 고려조선시대의 현존 천문대보다 큰 규모이다.

2층의 기단이 있고, 대략 30센티미터 두께의 돌로 27층을 쌓았으며, 꼭대기에는 다시 우물 정(井) 모양의 2층의 천장돌이 있다. 13층에서 15층에 이르기까지 정남향의 네모난 문이 있고, 이 문의 아래로 12층이 있고 위로 13층이 있으므로 첨성대 위아래의 중간에 문이 위치한다. 내부에는 12단까지 흙이 채워져 있고 여기에 사용된 돌의 수는 362개이다. 내부에 19단과 20단, 25단과 26단이 장대석을 이루고 있다.[5]

 

보존상태

2005년 언론 등의 보도에 따르면 북쪽으로 7.2센티미터, 동쪽으로 2.4센티미터 정도 기울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문가에 따르면 원인은 북동쪽 지반이 무르고 수분이 많은 탓으로 보고 있으며, 지역 주민들은 한국 전쟁 이후 기울어짐이 심해졌으며 당시 북쪽의 도로를 지나던 탱크 등에 의해 지반이 약화되었다고 보고 있다.[6] 문화재청은 이에 대해 우려할 수준은 아니며, 국내외 연구진에 의한 연구 결과 또한 구조적으로 안정적인 상태라고 밝히고 있다.[7]

 

용도

 

첨성대는 천문 관측을 위해 지어졌다는 주장이 일반적이나, 수미산 또는 우주를 상징하는 조형물이라는 주장이 있다.

첨성대는 그 위에 목조 구조물이 세워져 혼천의(渾天儀)가 설치되었으리라는 생각과, 개방식 ‘’으로서의 관측대라는 견해도 있다. 첨성대는 창문을 제외하면 어느 방향에서나 같은 모양이며, 계절태양의 위치에 관계없이 일구(日晷)를 측정하여 시간을 헤아릴 수 있으므로 4계절24절기를 확실히 정할 수 있다. 정남(正南)으로 열린 창문은 사람이 사다리를 걸쳐 놓고 오르내리는 데도 쓰였지만, 춘·추분(春·秋分)에 태양이 남중(南中)할 때 이 창문을 통하여 태양광선이 바로 대(臺) 안의 밑바닥까지 완전히 비출 수 있는 위치에 열려 있다. 그러므로 동·하지(冬·夏至)에는 창문 아래 부분에서 광선이 완전히 사라지게 되므로 분점(分點)과 지점(至點) 측정의 보조역할도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절기의 정확한 측정에 의하여 역법(曆法)을 바로 잡기 위한 측경(測景)을 목적으로 설립된 규표(圭表), 즉 측경대로서 일구를 측정하는 천문대일 뿐 아니라, 신라 천문관측의 중심지로서, 신라 천문관측에서 자오선과 동서남북 4방위의 표준으로 사용되었을 수 있다.

첨성대는 그 구조가 상징하는 바 하늘에 대한 중국의 전통적 가설인 천원지방설(天圓地方說)에 의거하여 축조되었으리라고 해석되고 있으며, 27단으로 이루어진 것은 선덕여왕이 27대 왕임을 상징한다는 해석도 있다. 천상(天象)의 이변(異變)이 있을 때 외에는 이러한 목적을 위한 상설 천문대로 생각하기는 어렵다는 견해도 있다.

 건립 시점

첨성대에 관한 최초 기록인 <삼국유사>는 첨성대의 건립시점을 선덕여왕대(632~647)로 밝히고 있고, <삼국유사> 이후의 사서에서도 이에 반하는 기록이 보이지 않으므로 선덕여왕대(632~647년)에 첨성대가 건립된 것만큼은 확실해 보인다.[8] 정확한 건립시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기록 및 견해가 존재한다.[9]

  • 선덕여왕 2년(633)설:<세종실록지리지> 경상도, 경주부 기록은 "唐太宗貞觀七年癸巳 新羅 善德女王 所築累石爲之"라고 했다. 당의 연호인 정관(貞觀) 7년은 계사(癸巳)년이며 633년에 해당한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준에 따르면 계사년은 선덕여왕 재위 2년(633)에 해당하지만, 조선시대 기준으로는 선덕여왕 원년(633)에 해당한다.[10] <세종실록지리지>가 첨성대 건립연도를 이와 같이 설정한 근거는 알 수가 없다. 만일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첨성대는 선덕여왕의 왕권강화를 위한 조형물일 가능성이 높다.
  • 선덕여왕 초년설: 민영규(1981)[11]는 첨성대가 분황사(634), 영묘사(635), 황룡사구층목탑(645)과 비슷한 시기에 세워졌을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를 지지할 명확한 근거가 제시된 것은 아니었으며, 다만 많은 학자들이 첨성대 건립시점을 선덕여왕 몰년(647)으로 보는데, 그렇게 볼 근거가 없다는 주장이었다. 그는 알천공, 김춘추, 김유신 등이 화려하게 선덕여왕을 보좌하고 있던 시절에 첨성대가 건립되었을 것으로 보았다. "첨성대 선덕여왕 초기 건립설"은 "첨성대 선덕여왕 말기건립 부정설"로 볼 수 있다.
  • 황룡사 구층목탑(645) 동시 건립설: 경주 첨성대는 직접적으로는 백제 천문대의 영향을 받아서 그와 비슷하게 축조된 것이 아닌가 추측되기도 한다. 그 축조 연대에는 많은 백제의 건축기술자들이 초빙되어 황룡사(皇龍寺) 9층탑 등이 건립된 시기이며, 그로부터 얼마 후인 675년에는 백제 천문학자들의 영향과 직접 지도 아래 일본에도 점성대(占星臺)가 설립되었다는 사실에서 볼 때 백제에는 이미 같은 음(音)으로 불리는 천문대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백제 천문대도 주비의 법(法)에 의하여 세워진 측경대였을 것이며, 그것이 신라에 영향을 주어 첨성대가 되었고 일본에 건너가서 점성대가 되었으며, 백제와 신라의 천문대는 당(唐)에 자극을 주어 723년에는 주공측경대(周公測景臺)의 재건(再建)을 보게 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최종석(2007)[12]은 "황룡사가 건립된 해에 축조된 첨성대도 이러한 문맥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했으며, 또한 "첨성대 축조는 선덕여왕 646년에 이루어졌다"고 했다. 황룡사 구층목탑은 선덕여왕 14년(645)에 착공되어 그해 4월 8일에 찰주를 세우고 이듬해인 선덕여왕 15년(646)에 완공된 것으로 보인다.[13] 그는 황룡사 구층목탑의 건립목적이 "대외적으로 실추된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려는 노력"에 있었다고 보았으며, 첨성대의 건립목적이 "대내적으로 당시 종교적인 갈등과 혼란을 무마시키고 화합하려는 의지"와 관련되었을 것으로 보았다.
  • 선덕여왕 말기(645~647)설: 김기흥[14]은 "분황사와 영묘사 그리고 황룡사9층목탑을 세운 바 있는" 선덕여왕이 "자신의 평생의 신앙과 소망을 엮어서 이 첨성대를 건축했던 것"으로 보았다. 즉, 첨성대 건립시점을 황룡사9층목탑 건립 이후로 본 것이다. 선덕여왕이 첨성대를 건립한 이유는 "첨성대를 통해 제석신이 이 땅에 강림하여 자신의 어려움을 해결해주기를 고대"했기 때문에 혹은 선덕여왕이 죽은 후에 "도리천으로 환생하기 위한 통로"로 세웠을 것이라고 했다. 김기흥에 의하면 첨성대는 현실세계와 천상세계를 연결하는 상징적인 "우주 우물"이다.
  • 선덕여왕 몰년(647)설: 다수의 학자들은 첨성대 건립시기를 선덕여왕 몰년으로 보는데, 주로 <증보문헌비고>[15] 기록을 따랐다. 그런데 이보다 이전 기록인 <삼국사절요>에 비담의 반란 발생(647년 1월 7일), 첨성대의 건립, 선덕여왕의 죽음(647년 1월 8일)이 차례대로 적혀 있다.[16] 만일 첨성대가 선덕여왕 몰년에 건립되었다면 첨성대는 선덕여왕의 죽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만일 첨성대가 선덕여왕의 죽음과 관련이 있다면, 이는 곧 첨성대가 천문관측소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낮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라가 당으로부터 천문학을 본격적으로 수용하기 시작한 것은 삼국통일이 이룩된 이후인 7세기 후반이다. 이는 <삼국사기> 新羅本紀, 文武王 14年, 孝昭王 元年, 聖德王 17年, 景德王 8年의 기록에 나타나는데, 문무왕 14년(674) 새로운 역법을 도입했고, 효소왕 원년(692)에는 당에서 천문도를 수입했고, 성덕왕 17년(718)에 처음으로 누각(漏刻: 물시계)과 누각전을 설치했으며, 경덕왕 8년(749)에 이르러서야 누각전에 천문(천문학)박사 1명과 누각(물시계)박사 6명을 두었다고 한다. 신라에 천문박사와 누각박사가 등장한 때는 첨성대가 세워진 약 100년 뒤인 경덕왕 8년(749)인데, 이즈음에 이르러서 신라가 체계적인 천문관측을 했다고 여겨진다

 

 

 

 

 

 

이집도 오래만에 와본다..

그때 누구하고왔는지 정말 맛있게 먹고갔는데..

경주는 곳곳에 쌈밥집이 많이있다..

 

 

 

 

주로 멸치젖갈을 많이 먹는데..

옛 생각이나서 찾아가봤다..

인당 9000원..

 

 

 

 

오래만에 먹은 멸치젖갈 맛나게 먹었다..ㅎㅎ

기장가면 멸치회도 먹을수있는데..

언제 또 먹을지..

 

 

 

삼포집 이것저것..

 

 

 

 

 

점심때가되니 사람들이 많이 온다..

 

 

 

 

 

 

 

 

 

 

 

 

 

 

 

 

 

 

 

 

 

 

 

 

 

점심먹고 바로옆에 있는 천마총으로..

 

 

 

 

 

 

 

 

 

 

바람이 많이 불어 춥다..

 

 

 

 

 

얼굴없는 저 아이는 멋 부린다고 집에 잠바을 놓고왔단다..

집에서 나갈때 입는것 분명히 봤는데...

 

 

 

 

 

 

 

 

 

 

 

 

 

천마총 (신라 무덤)  [天馬塚]

제155호 고분이라고 불려왔으나 1973년 문화재관리국에 의한 발굴조사 결과 무덤 안에서 자작나무껍질에 채색으로 천마(天馬)를 그린 말다래[障泥:국보 제207호]가 발견되어 천마총이라고 명명되었다. 거대한 봉토로 덮인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으로서 봉토의 바닥지름은 47m, 높이는 12.7m에 달한다. 무덤의 축조방법은 먼저 지면을 고른 뒤 바깥둘레돌[外護石]을 돌리고 그 안에 점토와 자갈을 다져쌓기[版築]해서 올린 후 여기에 덧널[木槨]을 동서방향으로 설치하고 덧널 주위에 돌무지를 쌓은 뒤 봉토를 씌운 방식을 취하고 있다. 일반적인 돌무지덧널무덤의 구조와 유사하며 다만 덧널이 지면보다 위에 있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덧널 위와 주변에는 지름 23.6m, 높이 7.5m 가량 돌을 쌓고 표면에는 방수를 목적으로 점토를 발랐다. 덧널 내부에는 강돌과 잔자갈로 석단(石壇)을 돌리고 그 위에는 유물을 배열했으며 석단의 내부에 길이 215cm, 너비 80cm 가량의 널[木棺]을 덧널의 장축방향에 맞추어 동서방향으로 안치했다. 석단의 바깥쪽에는 널과 직교하여 남북방향으로 껴묻거리 상자를 놓았다. 무덤이 만들어진 시기는 6세기경으로 추정되고 있다. 껴묻거리는 위치에 따라 봉토 내부, 덧널 상부, 널 주위의 석단 윗면, 널 내부, 껴묻거리 상자 등으로 구분된다. 봉토 내부의 유물로는 정상부 근처에서 마구류로 추정되는 금동판(金銅板)·미늘쇠[有刺利器]·쇠낫[鐵鎌]·쇠투겁창[鐵]·유리구슬[琉璃玉] 등이 출토되었다. 덧널 상부 출토유물로는 쇠도끼[鐵斧]와 굽다리접시[高杯]·뚜껑접시[蓋杯]·목단지[長頸壺]·단지[短頸壺] 등의 토기류, 금제 굵은고리, 가는고리귀걸이, 유리구슬 등과 대형환두철봉(大形丸頭鐵棒)·환형철구(環形鐵具) 등이 있다. 널 주위의 석단에는 동쪽에 관모(冠帽)·허리띠[帶]·띠드리개[腰佩] 등의 장신구류, 나머지 부분에는 무기와 마구류가 부장되어 있었다. 널 내부에는 금관(金冠), 목걸이[頸飾], 금제허리띠[金製帶]와 띠드리개, 금제·은제 팔찌, 금제반지, 봉황환두대도(鳳凰環頭大刀) 등을 패용, 착용한 인물이 머리를 동쪽으로 향한 채 반듯이 눕혀져 있었다. 껴묻거리 상자에는 다량의 유물이 들어 있었는데 뚜껑으로 생각되는 판재의 윗면에는 금제새날개모양관장식[金製鳥翼形冠飾]·금박편(金箔片)·금동관(金銅冠)·금동제관모(金銅製冠帽)·금동제정강이가리개[金銅製脛甲]등이 놓여 있었다. 상자 안에서는 재갈[轡]·발걸이[鐙子]·말띠드리개[杏葉]·밑동쇠[座金具]·말띠꾸미개[雲珠]·청동말종방울[靑銅馬鐸]·안장틀[鞍橋]·말다래 등의 각종 마구류와 투구 1점이 상단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그 아래에는 세발솥[鼎], 자루솥[鐎斗], 다리미, 크고 작은 합(盒), 굽다리접시 등의 금속제용기와 유리용기, 각종 칠기류가 빽빽이 차 있었다. 상자 아랫면은 4점의 쇠솥[鐵釜]이 받치고 있으며 쇠솥이 없는 곳에는 각종 토기류가 역할을 대신하고 있었다.

 

 

 

 

 

 

 

 

 

 

 

 

 

이제 어디로가나..

 

 

 

 

 

 

 

 

 

 

 

 

 

 

 

 

 

 

 

 

 

 

 

 

 

 

 

 

 

 

 

 

 

무덤쪽으로 걸어가는데..

찍사들 사진촬영하는데 잡혀~~~

 

 

 

 

 

 

 

 

 

 

 

 

 

 

 

 

 

 

 

 

 

 

잘 논다~~

 

 

 

 

 

 

 

 

 

 

 

 

 

 

 

 

 

 

 

 

 

 

 

 

 

 

 

 

 

 

 

 

 

 

 

 

 

 

 

 

 

계림으로간다..

 

 

 

 

 

 

 

 

 

 

 

 

 

 

 

경주시 교동에 있는 경주김씨 시조의 발상지.

 

 

사적 제19호. 원래 시림(始林)이라 하여 신라초부터 있던 숲으로 경역(境域)은 약 7,300㎡이며 느티나무·물푸레나무·싸리나무 등의 고목이 무성하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제4대 탈해왕(脫解王) 9년 3월 밤, 왕이 금성(金城:지금의 경주)의 서쪽 시림 가운데에서 닭 우는 소리를 듣고 신하에게 살펴보게 했다. 신하가 가보니 금궤 하나가 나뭇가지에 달려 있고, 흰 닭이 그 밑에서 울고 있었다. 신하가 돌아와 이 사실을 알리자 왕은 날이 밝는 대로 그 궤짝을 가져오게 해 열어보니 속에 총명하게 생긴 어린 사내아이가 있었다. 왕은 이를 기뻐하며 아이 이름을 알지(閼智)라 부르고, 금궤짝에서 나왔으므로 성을 김씨(金氏)라고 했다. 이때부터 시림을 계림으로 바꾸고, 나라 이름도 계림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삼국유사〉 신라 시조 혁거세왕조(條)에 보면, 왕은 계정(鷄井)에서 태어났고 왕비 알영은 계룡(鷄龍)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계림국(鷄林國)이라 나라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계림의 계(鷄)를 '새'로 읽어 계림은 '새벌'의 다른 표기에 불과하다는 설이 유력하다

 

 

 

 

 

 

 

 

 

 

 

 

 

 

 

 

 

 

 

 

 

 

 

 

 

 

 

 

석빙고 (조선 창고)  [石氷庫]

 

   얼음을 저장하기 위해 돌로 만든 창고.

겨울에 강에서 채취한 깨끗한 얼음을 저장했다가 여름에 사용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땅을 파고 만들었다. 이러한 빙고는 기록에 의하면 신라시대부터 만들어졌다고 하지만, 현존하는 것은 모두 조선시대에 축조된 것이며 그 구조가 거의 비슷하다. 밖에서 보면 무덤처럼 보이지만 내부는 땅을 깊게 판 다음 안쪽 벽은 석재로 쌓고, 바닥은 경사지게 만들어 물이 빠지도록 되어 있다. 천장은 석재로 무지개 모양으로 쌓아올려 궁륭형으로 되어 있고 환기구멍이 있다. 현재 경주 석빙고(보물 제66호)·안동석빙고(보물 제305호)·창녕석빙고(보물 제310호)·청도석빙고(보물 제323호)·현풍석빙고(보물 제673호)·영산석빙고(사적 제169호) 등이 남아 있다.

 

 

 

석빙고 구경하고나오는중..

 

 

 

내부..

 

 

 

 

 

 

 

 

 

 

석빙고 지붕..

 

 

 

 

 

 

 

 

 

 

 

 

석빙고을 뒤로하고 안압지로 고~~고..

 

 

 

 

 

 

 

 

 

 

 

도장 3개째..

 

 

 

 

 

안압지 (통일신라 연못)  [雁鴨池]

  

    신라 왕궁의 후원(後園)으로 삼국통일을 전후한 시기에 조성되기 시작하여 674년(문무왕 14)에 완성되었다. 1975~86년의 발굴조사에 의해 유구가 밝혀졌는데 연못을 둘러싸고 있는 석축호안(石築護岸)과 서쪽 호안변에서 5개의 건물지가 발견되었다. 부정형(不整形)의 석축호안은 서쪽 호안선만 직선으로 되어 있고 나머지 호안은 굴곡이 심한 곡면을 이루고 있다. 입수구(入水溝)는 동쪽과 서쪽의 호안이 만나는 곳에 설치되어 있고 출수구(出水溝)는 북쪽 호안에 있으며, 연못 안에는 3개의 섬이 있다. 연못의 바닥에서 신라 왕족과 귀족이 썼던 일상생활 유물인 목선(木船)·목상(木像)·장신구·주사위 등과 불교미술품인 불상, 광배, '조로 2년'(調露二年:680)이라는 명문이 씌어 있는 보상화문전 등 다수가 발굴되어 번성했던 통일신라시대의 문화를 보다 총체적으로 복원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안압지는 한국조경사에서 통일신라시대 원지(園池)의 원형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이다

 

 

 

 

안에는 그렇게...

야경이 참으로 아름다운곳이다..

 

 

 

 

 

돈내기 싫어 그냥 밖에서 몇장...

 

 

 

 

 

 

 

홀로 차 가지려가는중에...

 

 

 

 

 

 

 

 

 

 

 

 

 

 

 

 

 

 

 

 

경상북도 경주시에 있는 국립 박물관. 1926년에 총독부 박물관 경주 분관으로 설립되어, 광복 국립 박물관 경주 분관으로, 1975년 경주 박물관으로 개칭되었다. 경주 일원에서 나온 삼국 시대와 통일 신라 시대의 유물이 소장되어 있다.

 

 

 

 

 

추운니 실내로 들어간다..ㅎㅎ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鍾) 국보  제29호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가장 큰 종으로 높이 3.75m, 입지름 2.27m, 두께 11∼25㎝이며, 무게는 1997년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정밀측정한 결과 18.9톤으로 확인되었다.

신라 경덕왕이 아버지인 성덕왕의 공덕을 널리 알리기 위해 종을 만들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 뒤를 이어 혜공왕이 771년에 완성하여 성덕대왕신종이라고 불렀다. 이 종은 처음에 봉덕사에 달았다고 해서 봉덕사종이라고도 하며, 아기를 시주하여 넣었다는 전설로 아기의 울음소리를 본따 에밀레종이라고도 한다.

종의 맨 위에는 소리의 울림을 도와주는 음통(音筒)이 있는데, 이것은 우리나라 동종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독특한 구조이다. 종을 매다는 고리 역할을 하는 용뉴는 용머리 모양으로 조각되어 있다. 종 몸체에는 상하에 넓은 띠를 둘러 그 안에 꽃무늬를 새겨 넣었고, 종의 어깨 밑으로는 4곳에 연꽃 모양으로 돌출된 9개의 유두를 사각형의 유곽이 둘러싸고 있다. 유곽 아래로 2쌍의 비천상이 있고, 그 사이에는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가 연꽃 모양으로 마련되어 있으며, 몸체 2곳에는 종에 대한 내력이 새겨져 있다. 특히 종 입구 부분이 마름모의 모서리처럼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어 이 종의 특징이 되고있다.

통일신라 예술이 각 분야에 걸쳐 전성기를 이룰 때 만들어진 종으로 화려한 문양과 조각수법은 시대를 대표할 만하다. 또한, 몸통에 남아있는 1,000여자의 명문은 문장뿐 아니라 새긴 수법도 뛰어나, 1천 3백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손상되지 않고 전해오고 있다.

 

 

 

 

 

 

 

 

 

 

 

 

 

 

박물관 내부..

 

 

 

 

 

 

 

 

 

 

 

 

 

 

 

 

 

 

 

 

 

 

 

 

 

 

 

 

 

 

 

 

 

 

 

 

 

 

 

 

 

 

 

울산대곡리반구대암각화(蔚山大谷里盤龜臺岩刻畵) 국보  제285호

 

  높이 3m, 너비 10m의 ‘ㄱ’자 모양으로 꺾인 절벽암반에 여러 가지 모양을 새긴 바위그림이다. 바위그림을 암각화라고도 하는데, 암각화란 선사인들이 자신의 바램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커다란 바위 등 성스러운 장소에 새긴 그림을 말한다. 전세계적으로 암각화는 북방문화권과 관련된 유적으로 우리민족의 기원과 이동을 알려주는 자료이다.

1965년 완공된 사연댐으로 인해 현재 물 속에 잠겨있는 상태로 바위에는 육지동물과 바다고기, 사냥하는 장면 등 총 75종 200여점의 그림이 새겨져 있다. 육지동물은 호랑이, 멧돼지, 사슴 45점 등이 묘사되어 있는데, 호랑이는 함정에 빠진 모습과 새끼를 밴 호랑이의 모습 등으로 표현되어 있다. 멧돼지는 교미하는 모습을 묘사하였고, 사슴은 새끼를 거느리거나 밴 모습 등으로 표현하였다. 바다고기는 작살 맞은 고래, 새끼를 배거나 데리고 다니는 고래의 모습 등으로 표현하였다. 사냥하는 장면은 탈을 쓴 무당, 짐승을 사냥하는 사냥꾼, 배를 타고 고래를 잡는 어부 등의 모습을 묘사하였으며, 그물이나 배의 모습도 표현하였다. 이러한 모습은 선사인들의 사냥활동이 원활하게 이루어지길 기원하며, 사냥감이 풍성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바위에 새긴 것이다.

조각기로 쪼아 윤곽선을 만들거나 전체를 떼어낸 기법, 쪼아낸 윤곽선을 갈아내는 기법의 사용으로 보아 신석기말에서 청동기시대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선과 점을 이용하여 동물과 사냥장면을 생명력있게 표현하고 사물의 특징을 실감나게 묘사한 미술작품으로 사냥미술인 동시에 종교미술로서 선사시대 사람의 생활과 풍습을 알 수 있는 최고 걸작품으로 평가된다.

 

 

 

 

 

 

 

해가 넘어간다..

 

 

 

얼굴무늬 수막새

 

 

 

 

감은사 사리갖춤

 

 

 

 

황룡사 목탑 찰주본기

 

 

 

 

 

 

 

 

 

 

 

 

 

 

약사불..

 

 

 

황룡사와 망새..

 

 

 

 

 

이차돈 순교비..

 

 

 

금석문..

 

 

 

 

 

 

 

 

 

 

 

이제 집으로 갈 시간이다..

 

경주에서 김해까지..

이 시간에 얼마나 걸리지..

 

오래만에 온 경주..

유진이와 지훈이는 뭘~~~보았는지..^^

 

암튼 다음 여행을 기약하며...

 

다시 F11누르시구요..

 

여행은 살아가면서 참으로 좋은것이여..

꼭 해봐야 하는것...

 

 

       

 

  배낭과 항상 생활하실길...

             

 조권식 올림 치밭목산장 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