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
이제 여름 휴가도 끝나고..
길고 짧은 가족 여름휴가을 마치고
내가 먹고사는동네.
평택으로 올라가는 시간..
올라오는길에 서운함에 지리산자락으로 세상 구경을 간다..
구형왕릉..
서암정사..
벽송사..
오도재..
남해고속도로가 정체대는 바람에 함양 상림숲은 가보지 못했다..
상림숲은 다음에 남쪽에서 모임할때 가야겠다..
가을에 가면 좋타던데..
몇일째 정리을 하다보니 뭐가뭔지 좀 몽~~하다..
조카 영상앨범도 만들어줘야하는데..
아~~약속은 했고 피곤타..
마지막 휴가 편지입니다..
날씨는 여름날씨인데..
이상하게
가을 느낌이 난다..
어제 할아버지 제사을 지내고..
오늘 평택올라오기전 잠시
할아버지을 찾아가는길...
김해 천문대..
http://www.astro.gsiseol.or.kr/ 한번보세요..
김해 분산성..
http://tour.gimhae.go.kr/program/sights/view.jsp?m=M10104 클릭한번하세요..^^
담에 김해내려가면 다녀올께요..
김해시내쪽 으로 구경할것이 얼마나 많은데..
집에 내려가면 시간이없어 ..
처갓집이 부산이라 더 바빠요..
아버지가 보고계시는 세상..
그냥 평택으로 올라올수있나..
잠시 지리산 자락으로..
첫번째..
구형왕릉에서...
보충 설명..
경상남도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에 있는 가야 제10대 구형왕의 능으로 전해지고 있는 무덤. 사적 제214호. 구형왕은 구해(仇亥) 또는 양왕(讓王)이라고도 하며, 김유신(金庾信)의 증조부이다. 521년 가야의 마지막 왕이 되어 532년 신라 법흥왕에게 영토를 넘겨줄 때까지 11년간 왕으로 있었다.
이 무덤은 일반적인 봉토무덤과는 달리, 경사진 언덕의 중턱에 층단을 이루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잡석을 사용해 앞면은 7단, 뒷면은 경사진 비탈을 그대로 이용해 층단을 만들었다.
평지에 피라미드식 층단을 만든 것과는 차이를 보이고 있고 정상부는 타원형이다. 앞면의 전체 높이는 11.15m이다. 셋째 단 동쪽 면에는 가로 42㎝, 세로 47㎝, 길이 65㎝의 감실(龕室)형태의 시설이 마련되어 있으나 내용물은 없다.
이 무덤에 왕명을 붙인 기록은 조선시대 문인인 홍의영(洪儀泳, 1750∼1815)의 〈왕산심릉기 王山尋陵記〉에 처음 보인다. 이에 따르면, 이 무덤의 서쪽에 왕산사라는 절에 전해오는 〈왕산사기 王山寺記〉에 구형왕릉이라고 기록되었다고 한다.
왕산사는 없어지고, 다만 이 무덤을 위한 재실(齋室)이 있어 여기에 있는 왕산사에서 전해오던 목궤 속에서 구형왕과 왕비의 초상화·옷, 그리고 활과 칼 등의 유물이 나왔다는 것이다.
이 무덤 둘레에는 높이 1m 내외의 돌담을 쌓았다. 능의 정면 중앙에는 ‘駕洛國讓王陵(가락국양왕릉)’이라 새긴 비석과 더불어 혼유석·장명등·문인석·무인석·돌짐승 등 석물을 배치하였다.
그러나 이 석물들은 최근에 만들어 배치한 것으로 무덤이 처음 만들어질 때와는 직접적인 연관은 없다. 구형왕의 후손들이 1793년 덕양전(德讓殿)을 세워 오늘날까지 봄과 가을에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참고문헌≫ 文化財大觀-史蹟篇-(文化財管理局, 1975)
≪참고문헌≫ 伽耶文化圈遺跡精密調査報告書-山淸郡·咸陽郡-(昌原大學博物館, 1987)
≪참고문헌≫ 산청의 전구형왕릉에 곤한 일고찰(李道學, 향토문화 5, 향토문화연구회, 1990)
난 몇번 다녀왔는데....
이위에 있는산이 왕산..필봉산..
지리산 동부능선이 한손에..
류의태 약수도 맛이있고..
다시 올라가고 싶었지만 너무더워서~~~
한국판 피라미드..
저 가운데 구멍보이죠..
아무것도 없으요..ㅎㅎ
덕양전 정문과 홍살문
덕양전은 양왕과 계화 왕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원래 수정궁으로 왕릉 가까이 있었는데 고종 15년 덕양전으로 개칭하고 1928년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그 유래는 서기 532년 신라 법흥왕 19년(가락기원491년)나라를 신라에 선양하고 이곳 왕산 수정궁으로 이어하여 5년후 돌아가셨다. 그 후 향화를 계속하다가 전화로 중단되었다가 서기1798년 심릉후 능하에, 능침을 짓고 다시 향례를 올렸다. 서기 1989년 숭선전(김해수로왕 능침)이 사액됨과 동시에 덕양전으로 개칭하여 서기 1930년 현재의 위치로 이건되어 1991년 문화재 정화사업에 의하여 중건되었다.
가락국 제10代왕 양왕(위 仇衡)과 왕비(위 桂花) 양위의 위패를 모시고 춘추향례와 삭망향화를 드리는 덕양전(德讓殿) 이다. 그 유래는 서기 532년 신라 법흥왕19년(가락기원491년) 나라를 신라에 선양하고 이곳 왕산 수정궁으로 이어하여 5년후 돌아가셨다 그후 향화를 계속하다 전화로 중단되었으며 서기 1798년 심릉후 능하에 능침을 짓고 다시 향례를 올렸다. 서기 1898년 숭선전(김해수로왕 능침)이 사액됨과 동시에 덕양전으로 개칭하여 서기1930년 현재의 위치로 이건되어 1991년 문화재 정화사업에 의하여 중건되었다고 전한다.
저 뒤산이 왕산...
칠선계곡 자락에서 늦은 점심을..
서암정사 가는길..
벽송사 가는길.
지훈이 엄마 뱃속에 있을때는 이런길이 아니였는데..
서암정사입구에서..
http://www.sueam.net/ 여유가되면 한번쯤 꼭~~
서암정사의 유래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민족의 미극이 유난히도 치열하고 깊었던 이곳 지리산(智異山), 1960년경 전화(戰禍)가 지나간 지 한참 뒤이지만 산간오지(山間奧地) 두메산골인 벽송사(碧松寺) 주변에는 아직도 전쟁의 상흔(傷痕)이 곳곳에 남아 있다.
그러나 대자연(大自然)의 섭리가 인연(因緣)에 사로잡인 인간들의 희비에개의치 않나니, 한 때 천지를 진동하던 총성과 온 산을 뒤덮었을 포연(砲煙)의 폭풍이 휩쓸었을 이곳에도 언제 그런 일이 있었나는 듯 산새가 지저귀고 봄이 오니 꽃이 핀다.
오늘날 서암정사(瑞庵精寺)가 있게 된 것도 역시 억겁(億劫)의 인연과 대자연이 빚어낸 조화의 한 그림자가 아닌가 한다. 문득 지난 일을 회상하니, 벌써 40여 년 전이다. 내 어느 날 복잡한 도시인 부산을 뒤로하고 청산(靑山)에 파묻힐 양으로 심산유곡(深山幽谷)의 수행처(修行處)를 찾아 정처 없이 흰구름 따라 발길 닿는 대로 온 곳이 여기 벽송사다.
인적도 드믈어 한적한 산사(山寺)벽송사, 때로는 감자를 심어 끼니를 때우고 몸소 흙더미를 치워가며 이어지는 수행생활은 고달프기 그지없다. 너무 힘이 들고 갈등도 많이 생겨 여기를 떠나버릴까 하는 마음이 몇 번이나 일어나기도 한다. 하지만 그때마다 비가 새는 법당에 탈금(脫金)이 다 되어 새까만 모습으로 초라하게 앉아 계신 부처님을 들여다보며 망설이기를 거듭하면서 그럭저럭 눌러앉아 "여기가 또한 인연지(因緣地)려니.."여기고 폐허를 수습하다 보니 어언 10여 성상(星霜)이 훌쩍 흘렀다.
구석구석 묵은 쑥대가 나부끼는 1970년대 초의 어느 포근한 봄날 오후, 선정(禪定)에서 일어나 조용히 경내를 거닐면서 한 발짝 한 발짝 잊혀져 가는 묵은 옛길을 따라 알 수 없는 무슨 기운에 이끌리듯 와서 멈춘 곳이 바로 오늘의 서암정사 터다.
석굴법당 조성造成 경위
이곳이 만년도량(萬年道場) 의 성지(聖地 )임을 확신하고 산승(山僧)이 도량 주변을 조심스럽게 살피던 중 사람이 일부러 깍아놓은 듯한 거암, 즉 지금의 석굴법당 전면(前面)에 다다른 순간 몸과 시선이 굳어진 듯 멈추었다.
"여기로구나, 아! 좋구나...."
조용히 눈을 감고 부처님의 영산회상, 그리고 아미타상을 상상했다. 지극한 마음으로 한없이 기도하면서 염원(念願)의 심층에서 떠오르는 어떤 영상(影像)을 느끼니 바로 아미타불(阿彌陀佛)의 세계(世界)로다.
전쟁의 참화(慘禍)로 이 주변 지리산에서 희생된 무수한 원혼(寃魂) 들의 마음의 상처를 달래고 남북으 첨예한 대립의 벽을 허물고, 나아가서는 모든 인류(人類)가 부처님의 대자비(大慈悲) 광명 안에서 평화로운 이상사회(理想社會) 가 실현되기를 발원(發願)하면서 부처님을 조성하게 된다.
조성과정의 이야기들
서암정사는 대자연의 섭리가 빚어낸 조화로 준비된 장소에 여러 사람들의 크고 작은 공덕이 보태지면서 비로서 오늘날의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 30여년 전 불사(佛事)를 시작한 이래 적지 않은 난관과 고초를 겪었지만 좌절하지않고 장엄한 사찰을 조성할 수 있었던 것은 불보살의 보살핌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여러 사주 들의 정성어린 물심양면 공덕과 더불어 석공들의 공덕을 들지 않을 수 없다. 홍덕회, 이종원,이승재, 이금원, 이인호, 맹갑옥 석공은 지극한 정성과 노력으로 한치의 흘림 없이 조각을 완성했다.
석굴법당의 아미타 본존불은 이승재 석공이 시작했고, 본존불 외에 석굴법당의 여러 부조는 홍덕회 석공이 조각했으며 맹갑옥 석공이 조역을 했다. 주산신과 독수성은 맹갑옥 석공이 겉석을 치고 홍석희 석공이 세조각(細彫刻 )으로 마무리 했다. 사천왕상과 비로전은 이종원 석공이 중심이 되어 완성했고 배송대는 이금원 석공이, 용왕단은 이인호 석공이 각각 조각했다
여러 석공 중에서 특히 홍덕희 석공은 서암정사에서 10년 이상 머물면서 석굴법당을 위시해 사자굴의 모든 조각을 마무리 했다. 마천면 추성리와 의탄리의 몇몇 인연이 있는 분들은 처음 터를 닦을 때부터 시작해 도량 조성 과정의 크고 작은 일에 큰 힘을 보탰다.
험한 장소에서 도량을 조성하다보니 뜻밖의 사고로 자칫 불사가 중단될뻔 한 적도 있었으나, 그때마다 불보살의 도움으로 순조롭게 오늘에 이를 수 있었다.
20여 년 전쯤일까. 지금의 사천왕성 맞은 편에 있는 돌탑을 쌓을 때였다. 탑 쌍기를 끝낼 무렵 점심시간이 되어 일꾼들을 태워 경운기를 재조한 짐차(일명 탈탈이)을 몰고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오다 브레이크가 고장 나버렸다.
운전자를 포함해 일곱 명이 탄 짐차는 걷잡을 수 없이 언덕길을 미끄러져 내려갔다. 불행 중 다행으로 짐차가 쌓고 있던 탑에 부딪혀 탑을 무너뜨리고 멈춘 덕분에 언덕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대형사고를 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람을 점검해보니 한 사람이 보이지 않아 자세히 살펴보니 무너지 돌 더미 속에서 옷자락이 내다 보였다. 황급 결에 관세음보살을 염하면서 무너진 돌 더미를 치워내자 탑 쌓는 기술자가 모로 누워 기절한 채 돌 밑에 깔려 있었다. 호흡도 거의 끊어져 있었으나 한 참 뒤에야 돌아왔다. 병원에서 정밀 진단을 한 결과 갈비뼈 3대만 부러지고 다른 곳은 이상이 엇었다.
나중에 이야기하기를 이 사람은 사고가 나는 순간 비몽사몽간에 흰옷을 입은 노인이 자신을 밀어 올리는 것을 느낀 것 외에는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입원해 있을 때도 같은 노인이 나타나 밀치는 바람에 병상에서 떨어진 적이 있다고 했다. 상처로 인하여 신체가 허약해지고 정신이 극도로 혼미해질 때 관세음보살이나타나 정신을 차리게 한 것이다.
서암정사 문지기...
저 안에가 오리지날인데..
옛전에는 사진도 찍었는데..
지금은안에서 통제하고있다..
칠선가려면 저 길을 올라야한다..
뭐 옆으로 빠지는 길도있다..ㅎㅎ
여건이되면 꼭 가보시라..
아니 지리산에 가면 꼭 가시라..
옛전에는 금 두꺼비을 못보았는데..
벽송사 가는길..
지훈이 배속에 있을때는 유진이 손잡고
걸어서 갔는데..
이번에는 차가 올라가네..
땡잡았다..
벽송사 --목장승
새로 공사하여 많이 변해있었다..
이제 절도 잘한다..
자세나온다..
칠선을 나오면서..
오도재 전망대에서 바라본 지리..
지리1관문
팬티만입고...세상구경..
올라갔다 바로내려오니 찍기가 힘들다..
소공원..
아름다운 도로..
오도재..
정자도 만들어져있어
저녁에 사진찍기에 딱..
자~~
이것으로 여름휴가 여행이야그...
마무리합니다..
여행은 나의 재산이다....
배낭과 항상 생활하실길...
치밭목 산장(조권식) 올림 치밭목산장 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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